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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원인 과정 총정리

오늘의발견관리자 2025. 7. 19. 15:15

 

 

제주 4·3 사건 원인 과정 총정리

2025년, 제주 4·3 사건이 발생한 지 7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아름다운 평화의 섬으로 기억되는 제주도이지만, 그 이면에는 현대사의 가장 참혹한 비극 중 하나로 꼽히는 깊은 상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서는 이 사건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폭동'이라는 오명 아래 진실이 은폐되었던 이 사건은,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노력 끝에 비로소 국가 폭력에 의한 민간인 대규모 희생이라는 진실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포스팅에서는 제주 4·3 사건의 원인부터 과정,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까지 총정리하여 그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비극의 서막: 발단과 배경

1947년 3·1절, 그날의 총성

모든 비극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오해와 과잉 대응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4·3 사건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 마당에서는 삼일절 28주년 기념 집회가 열렸습니다. 집회 후 시가행진 과정에서 기마경찰이 탄 말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고가 발생했고, 군중들이 항의하며 돌을 던지자 경찰이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여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발포로 인해 민간인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제주도민들의 분노에 불을 지폈습니다.

민관 총파업과 미군정의 강경 대응

경찰의 발포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 3월 10일부터 시작된 민관 합동 총파업에는 제주도 전체 직장인의 95%에 달하는 166개 기관단체, 4만 1,211명이 참여하는 전무후무한 저항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당시 남한을 통치하던 미군정의 시각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이 거대한 저항을 단순한 민심의 분노가 아닌, 좌익 세력의 사주를 받은 조직적인 반미 활동으로 규정했습니다. 미군정은 제주도를 '붉은 섬(Red Island)'으로 지목하고, 육지에서 응원 경찰과 극우 반공 단체인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대거 파견하여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습니다.

'붉은 섬'이라는 낙인과 서북청년회

여기서 '서북청년회'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해방 후 월남한 평안도, 황해도 등 이북 출신 청년들이 결성한 극우 반공 단체로, 공산주의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제주에 들어온 이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파업 주동자 색출을 명분으로 도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검거하고 끔찍한 고문과 테러를 자행했습니다. 이들의 만행은 제주도민들의 반감과 공포를 극대화시켰고, 상황은 점점 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약 2,500명이 검거되고 이 중 250여 명이 재판에 회부되는 등 강경 진압이 계속되자, 많은 도민과 지도자들은 이를 피해 한라산으로 숨어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의 불씨가 온 산을 태울 수 있다는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3·1절의 비극적인 발포 사건이 도민 사회 전체의 분노를 일으켰을 때, 국가 권력이 이를 현명하게 보듬고 해결하려 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소통과 화해 대신, '이념'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낙인찍었습니다. 특히 외부 세력인 서북청년회의 개입은 기름을 붓는 격이었습니다. 지역 공동체의 특수성과 도민들의 순수한 분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자행된 무자비한 폭력은, 결국 더 큰 비극인 무장봉기를 불러일으키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섬을 뒤덮은 광기: 무장봉기와 초토화 작전

1948년 4월 3일, 봉화는 올랐다

1948년, 한반도의 정세는 남한만의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으로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이에 반대하는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제주도당은 단독선거 저지를 목표로 '2·7 투쟁'을 전개했고, 탄압이 극에 달하자 마침내 무장봉기를 결심하게 됩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김달삼을 중심으로 한 약 350명의 무장대가 '단선·단정 반대', '경찰과 서북청년회 타도'를 외치며 도내 12개 경찰지서와 우익 단체 인사의 집을 습격하며 봉기의 횃불을 올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주 4·3'의 시작이었습니다.

평화 협상의 결렬과 강경 진압의 시작

사태 초기, 현지 군 지휘관이었던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무력 진압만으로는 사태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과 직접 만나 평화 협상을 시도했고, 4월 28일 극적으로 '72시간 내 전투 중지'에 합의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미군정의 시각은 강경했습니다. 미군정 장관 윌리엄 딘은 이 평화 협상을 무시하고, 오히려 방화 사건 등을 무장대의 소행으로 조작하며 강경 진압의 명분을 쌓았습니다. 결국 평화 협상을 주도했던 김익렬은 해임되고, 그 자리에 강경파인 박진경 중령이 임명되면서 대화의 문은 닫히고 말았습니다.

5·10 총선 무산과 초토화 작전

무장대와 제주도민들은 5·10 총선거를 거부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고, 그 결과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유일하게 제주도의 2개 선거구(북제주 갑, 북제주 을)가 투표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전국 투표율이 94.9%에 달했던 것과 비교하면 제주도의 투표율 62.8%는 도민들의 저항 의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수치였습니다. 이에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은 제주를 완전히 고립시키고 섬멸하는 작전을 계획합니다. 1948년 10월 11일,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폭도로 간주해 총살한다"는 충격적인 포고문이 발표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군경 토벌대는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집단 학살하는, 이른바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습니다. 11월 17일에는 계엄령까지 선포되었고, 1948년 10월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전체 희생자의 70% 이상이 집중적으로 발생했습니다.

'초토화 작전'이라는 네 글자에 담긴 무게는 실로 엄청납니다. 이는 국가가 자국민을 보호 대상이 아닌, 섬멸해야 할 적으로 규정했음을 의미합니다. 해안선에서 5km 안쪽은 삶의 터전이었지, 적진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 살던 주민들은 '폭도'가 아니라 평범한 농부이자 아내였고, 아들이고 딸이었습니다. 단지 중산간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했던 이 끔찍한 논리는 국가 권력이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명백히 보여줍니다. 평화롭게 살던 마을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이웃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광경을 목격해야 했던 도민들의 공포와 절망은 과연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끝나지 않은 비극과 진실을 향한 여정

불법 군법회의와 예비검속 학살

초토화 작전의 공포 속에서 많은 주민이 "산에서 내려오면 살려주겠다"는 선무공작을 믿고 하산했습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토벌대는 하산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협력자'를 색출한다며 1,660여 명을 재판도, 변호도, 판결문도 없는 불법 군법회의에 회부하여 사형 또는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비극은 또 다른 형태로 반복되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전국 형무소에 수감된 4·3 수형인들과 '범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구금한 '예비검속자'들을 불법적으로 학살했습니다. 진압 과정에서 살아남았더라도 '빨갱이' 가족이라는 연좌제의 굴레 속에서 숨죽여 살아야 했습니다.

침묵의 시대와 <순이삼촌>

군사정권 하에서 제주 4·3은 '북한의 사주를 받은 공산 폭동'으로 규정되었고, 이에 대한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었습니다. 수십 년간 이어진 기나긴 침묵을 깨뜨린 것은 1978년 발표된 소설가 현기영의 중편소설 <순이삼촌>이었습니다. 북촌리 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참혹한 기억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한 여인의 삶을 그린 이 소설은 4·3의 진실을 세상에 알린 최초의 문학적 증언이었습니다. 작가는 이 소설 때문에 정보기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책은 금서로 묶이는 등 큰 탄압을 받았지만, <순이삼촌>이 던진 파문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맞물려 4·3 진상규명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다랑쉬굴, 44년 만에 드러난 진실

1992년 4월, 제주시 구좌읍 다랑쉬오름의 한 동굴에서 44년 동안 잠들어 있던 11구의 유해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들은 1948년 12월 토벌대를 피해 동굴에 숨었다가, 토벌대가 입구에 피운 불 연기에 질식해 숨진 일가족이었습니다. 유해 중에는 7살 어린이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동안 증언으로만 떠돌던 집단학살의 참상이 구체적인 증거로 드러난 '다랑쉬굴 사건'은 온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더는 4·3의 진실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비극이 끝난 후에도 살아남은 이들의 고통은 계속되었습니다. 정당한 재판 절차도 없이 죽거나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전쟁의 혼란 속에서 또다시 학살당하는 역사는 국가가 개인의 삶을 얼마나 철저히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암흑의 시기에, 펜 하나로 거대한 권력의 거짓에 맞선 현기영 작가의 용기와 44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다랑쉬굴의 유해는 우리에게 진실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가르쳐 줍니다. 아무리 깊이 묻고 덮으려 해도, 진실은 언젠가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역사의 증언은 때로는 핏빛 소설로, 때로는 차가운 유골로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우리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화해와 상생을 향하여: 2025년, 현재의 4·3

특별법 제정과 국가의 사과

수많은 이들의 염원과 노력 끝에 2000년 1월, 마침내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이를 근거로 설치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위원회는 2003년 10월, 4·3 사건을 '국가 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인권유린'으로 규정한 진상조사보고서를 확정했습니다. 그리고 2003년 10월 31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를 직접 방문하여 국가 권력의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제주도민과 유족들에게 사과했습니다. 이는 국가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들과 화해하려는 노력의 역사적인 첫걸음이었습니다.

국가기념일 지정과 배상·보상의 길

이후 2014년 4월 3일은 국가기념일인 '4·3 희생자 추념일'로 지정되었고, 매년 정부 주관의 추념식이 거행되고 있습니다. 더욱 진일보한 조치는 2021년 2월에 통과된 4·3 특별법 전부 개정안입니다. 이 개정안은 희생자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명시하고, 불법 군사재판 수형인들에 대한 특별재심의 길을 열었습니다. 2025년 현재, 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배·보상 절차가 진행 중이며, 수많은 수형인들이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으며 70여 년 만에 억울한 누명을 벗고 있습니다.

현재 진행형인 과제들

국가의 사과와 배상이 이뤄지고 있지만, 4·3의 완전한 해결은 아직 현재 진행형입니다. 여전히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 유해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며, 4·3의 역사를 왜곡하고 폄훼하려는 일부 세력의 도전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4·3의 교훈을 잊지 않고 미래 세대에게 올바르게 전하는 것입니다. 제주 4·3 평화공원과 트라우마 치유센터는 단순한 추모 공간을 넘어,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배우는 교육의 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025년 오늘, 우리는 4·3을 과거의 비극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넘어, 이제는 화해와 상생, 그리고 평화의 가치를 실현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국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은 그 시작일 뿐, 진정한 치유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4·3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교훈을 내재화할 때 가능합니다. 제주 4·3은 특정 지역의 비극이 아니라, 국가 폭력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는지, 이념의 대립이 인간성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한민국 현대사 전체의 교훈입니다. 동백꽃이 피고 지는 4월이 오면, 우리는 억울하게 스러져간 영혼들을 기억하며 다시는 이 땅에 그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가 4·3 희생자들에게 바칠 수 있는 진정한 추모일 것입니다.